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오시프 스탈린 (문단 편집) == 여담 == * 스탈린은 매우 모순된 성격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냉철한 지성과 강인한 신념을 소유한 [[혁명가]]였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마키아벨리즘|목적의 달성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독재자]]이기도 했다. * 동시대의 [[독재자]]이자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아돌프 히틀러]]와 비교하면 비슷한 점이 여럿 있다. 둘 다 권력을 가지기 전까진 모두 다 가소평가 했다. 대외적인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른 본성을 가지고 있고 몇백만의 학살을 한 자 치고는 감수성이 풍부했다. 그리고 둘 다 고소공포증(....)을 가지고 있어 비행기보다는 기차를 선호했다. 또한 둘 다 [[군부]]에 대한 불신으로 현장 지휘에 매우 간섭했다. 흥미롭게도 이 독재자들의 상황과 군부에 대한 시선의 시간에 따른 경향 변화는 상반된다. 군부에 대한 불신으로 숙청을 휘두른 스탈린 때문에 독소전쟁 발발 당시 러시아는 연이은 참패를 경험해야 했다. 군대 경력이 전무한 스탈린은 전술에 대한 실력이 없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숙청시켰던 장교들 몇을 복직시켰다. 이 후 전쟁이 진행될수록 본인의 권력이 공고해져 쿠테타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군부에게 재량권을 주기 시작했다. 반면 히틀러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상병]]으로 전역했으며 본인도 이 군 경력을 매우 자랑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의 패전에 대한 책임이 [[프로이센]]류 군부에 있다 믿었으며, 혐오하고 전쟁 내내 영향력을 줄이려고 노력했다. 이 경향은 군부 주류가 다들 무시했으나 본인이 밀어붙인 [[낫질 작전]]이 대성공을 터트리면서 더욱 강해졌다. [[친위대(나치 독일)|SS]]에 대한 대대적인 힘을 줬던 것도 이 이유. 이는 전황이 불리해지는 후반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스탈린과는 반대로 현장 지휘에 계속 간섭했다. * 스탈린은 매우 괴팍하고 격정적인 사람일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의외로 그는 품행이 단정한 인간이었다. 정적들이 스탈린의 잔혹성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지 못하고 과소평가했기에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른 것이었다. 겉으로 희노애락을 드러내는 경우가 드물었으며, 제아무리 화가 났더라도 욕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다만 겉으로 단정한 척 했을뿐이지 레닌이 트롯츠키를 지지하며 스탈린 자신의 입지에 위기가 오자 본성을 드러내며 레닌의 아내인 [[나데즈다 크룹스카야]]에게 전화로 ‘창녀’, ‘매독 걸린 암캐’같은 욕설을 퍼부으며 협박하여 레닌이 스탈린에게 사과를 요구하고 절교를 경고한 편지를 보내는 일도 있었다.[* 스탈린이 최고통치자의 자리에 오른 이후로도 스탈린과 사이가 좋지 않아서 대숙청이 한창 진행되었을 때 재판을 직접 참관하면서 이런 재판이었으면 남편도 처형되었을 것이며 대놓고 쓴소리를 날리기도 했다. 그나마 레닌의 아내였기 때문에 시베리아로 추방당하거나 처형당하는 일은 없었지만 이러한 불편한 관계때문에 크룹스카야가 사망했을 때 스탈린이 독살했다는 음모론이 나돌기도 했다.] 또한 스탈린은 사색적인 인간이었다. 그는 공적인 장소에서 주제와 무관한 이야기를 하는 법이 없었으며 불필요한 서론이나 장광설, 농담을 좋아하지 않았다. 반면 충분한 교육을 받지 못해서 조리 있게 이야기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대단히 참을성 있는 태도를 보였다. * 그는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논쟁할 때 상대방의 눈을 무자비하리만큼 뚫어져라 쳐다보는 버릇이 있었다. 스탈린의 냉혹한 시선을 정면으로 받은 사람은 속으로 불안을 느끼게 마련이었다. 앉아서 이야기할 때 스탈린은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는 버릇이 있었다. 몸짓이나 손짓은 그다지 하지 않았지만, 특별히 강조할 만한 사안이 있을 경우에는 손을 사용했다. 스탈린의 목소리는 억양이 거의 없었고[* 순혈 러시아인이 아닌 러시아 제국 치하의 조지아 출신이기 때문에 모어가 러시아어가 아니라 억양이 없었으며 항상 조지아어 후음성이 나왔다고 한다.], 큰소리를 내는 일도 좀체로 없었다. 그러나 일단 그의 입이 열리면 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는 곳이라도 순식간에 쥐죽은듯이 조용해졌다. 스탈린의 말솜씨는 독특한 스타일이 있었고, 비범한 아이디어가 있었다. 스탈린은 결코 급하게 서두르는 법이 없었으며 그와 같이 일을 하는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던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꼈다. 실제로 1941년 11월 7일, 혁명 기념일 연설 당시 독일군이 [[모스크바]] 코앞까지 쳐들어온 상황임에도 스탈린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 그는 누군가로부터 보고를 받을 때는 방안을 꼿꼿한 걸음걸이로 왔다 갔다 하며 귀를 기울였다. 몇 걸음 걷다가 멈춰서 사람들의 반응을 확인하고 다시 걸어다니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서 몇 분간 가만히 앉아 있곤 했는데 자기가 들은 보고를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판단하는지 탐색하려는 것이었다. 때로는 "어떻게 생각해?"라며 간결하게 묻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스탈린의 취향에 맞게 최대한 간결하고 쓸데없는 말을 빼고 대답하려 노력해야만 했다. * 스탈린은 식사도 느긋하게 하는 편이었다. 아무리 맛있는 요리가 있어도 결코 나이프와 포크를 바쁘게 움직이는 법은 없었다. 천천히 약간만 먹는 것이 스탈린의 식습관이었다. 술 중에서는 와인을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언제나 본인 스스로 마개를 따고는 라벨을 주의깊게 바라보곤 했다. * 스탈린은 절대로 서류를 들고 다니지 않았다. 연필이나 펜을 가지고 다니는 일도 없었다. 그는 어떠한 경우에도 메모하는 법이 없었다. 그리고 주위 사람이 메모를 하는 것도 안좋아했는데, 당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장 드미트리 셰필로프는 스탈린이 자신의 말을 메모하지 말라고 자주 짜증을 냈으나, 몇시간이나 이어지는 스탈린의 교시를 기억력으로만 담아갈 수 없었으므로 다들 식탁보 밑에서 몰래 기록하곤 했다고 증언했다. 스탈린은 올빼미 체질이라 일은 주로 밤에 했다. 일반인들이 스탈린에게 가지는 선입견과 달리 그는 [[독소전쟁]] 중 전선으로부터 안좋은 보고를 받고도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는 몇 안되는 사람중에 한 명이었다. * 스탈린은 상당한 독서가였다. 그는 러시아의 고전에는 능통했으며, [[셰익스피어]], [[하인리히 하이네|하이네]], [[오노레 드 발자크|발자크]], [[기 드 모파상|모파상]]의 책들을 좋아했다. 이외에도 많은 문학을 섭렵했으며,[* [[미하일 불가코프]]의 팬으로, 미하일 불가코프가 소련 당국을 비판하는 성향의 작가였음에도 어느정도 봐주어서 용케도 수용소로 보내지 않고, 극장에 취직시키고, 말년을 침대에 보낼수있게 했다. 다만 작품 여러개는 출판을 금지시키기는 했다.] 역사에 대해서도 많은 독서를 했다. * 스탈린은 정치국에서 발언시 항상 자신의 생각을 간결하게 말했다. 극히 난해한 정치적 문제에 대해서도 항상 요점만을 간단히 말했다. 그러나 일부 정치국원들은 스탈린과는 달랐다.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는 매우 정열적으로 이야기하는 스타일이었고, 카가노비치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를 가지고 있어 그것을 억제하기가 어려웠다. 스탈린은 정치국원들이 사무실 밖에서 어울리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스탈린 시대의 정치국원들은 함께 [[휴가]]를 간다거나, 심지어 2~3명이 함께 차를 타고 다니는 일도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부주의한 행동이나 대화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이 큰 압박감을 느끼고 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실제로 스탈린이 죽고 나서 [[장례식]]이 치뤄지기 전날, [[니키타 흐루쇼프]]의 방안에서 폭소가 터져나왔다. 거기에는 정치국원들이 모두 모여 있었는데, 그들은 다음날 슬픈 얼굴로 스탈린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정치국원들이 독재자의 죽음을 얼마나 기다렸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 이미지에 비해 굉장히 심약해서 잔걱정과 겁이 많은 성격으로, 권력의 정점에 오른 뒤에도 불안을 버리지 못해 [[대숙청]]을 감행하였다. 특히 군을 믿지 못해 장교를 왕창 죽였으며, 이것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소련군]]이 고전하는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 때문에 [[미하일 투하쳅스키]] 같은 많은 유능한 장교들이 숙청당했고, [[콘스탄틴 로코솝스키]]도 거의 죽을 뻔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군을 믿지 못하는 데에는 나름의 합리적인 이유가 있었다. 적백내전을 거치면서 형성된 붉은 군대, 소련군은 매우 정치화되어있던 군대였고 국가대사에 사사건건 자기 목소리를 내려고 했다. 군을 정치의 수단으로써 생각했던 스탈린 입장에서는 미리 싹을 잘라버리는 것이 맞았다. * 매우 사무적이고 꼼꼼하여 수많은 서류를 자신이 직접 보고 결재하고 계산해 가며 업무를 했다고 한다. 그런 과도한 업무에다가 자신이 신경 안써도 될 너무 많은 일에 신경을 쓰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다 독소전쟁 시절에는 직업군인들이 짠 작전의 세부적인 면에까지 간섭하다가 몇 번 크게 말아먹었고, 그 다음부터 작전에 그다지 간섭을 안 했었던만큼 그래도 최소한의 이성은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정작 자신은 새벽 3~4시까지 일하고 잠자리에 든 뒤 다음날 11시쯤 늦게 일어났는데 주위 당 간부들과 군 장교들은 스탈린이 그러고 나서도 아침 일찍 업무시간을 엄수해야 했으므로 실질적으로 잘 수 있는 시간이 2~3시간도 안되는 경우도 많았다. 거기다 술까지 폭음을 했기에, 주위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과로에 수면부족에 숙취까지 3중고로 시달려 결국 병을 얻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이런 상황은 스탈린 통제 하의 동유럽 공산당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여서, 스탈린의 생활리듬에 맞춰 동유럽 공산당 지도자들도 생활리듬을 모두 바꿔야 했고, 언제 스탈린이 전화를 때릴지 몰라 늘 전화기 옆에 붙어 있어야 했다고 한다. * 머리는 명석했으며, 판단력이나 이해력은 서방의 관찰자들도 놀라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기억력도 치매에 걸리기 이전에는 매우 좋았는데 문제는 잊어버려야 할 사소한 원한 같은 것도 마찬가지로 기억했다가 후에 모조리 배로 갚는다는 점. 아주 기억하기도 힘든 작은 노여움 때문에 후에 숙청당한 이도 많았다. 반대로 작은 은혜도 기억해뒀다 갚았는데 스탈린이 유배 생활 도중에 즐겁게 지내고 동지들과 연락하는 걸 방조해주었다는 이유로 부농으로 몰린 유형지 간수 하나를 그냥 풀어준 경우도 있었고, 또 어릴 적 신학교에 다니다 불온서적을 걸렸을 때 자기꺼라고 하면서 감싸줬던 급우나 시베리아에서 탈출할 때 잠깐 태워준 마부도 기억해뒀다 보답했다고 한다.[* 마부 사건이 스탈린 특유의 편집증 끝판왕인데, 스탈린은 처음에 누군지 모르겠다고 더 자세히 얘기해보라고 뜸을 들였다. 근데 사실 스탈린은 이 마부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뜸을 들였냐면은 이 마부가 처음에 스탈린이 태워달라고 했을때 바로 안태워주고 개겼기 때문. 그래서 자기도 조금 뜸 들이다가 구해준 것이다.] 막심 리트비노프는 런던에서 스탈린이 항구 노동자들에게 두들겨맞던 걸 구해준 것 때문인지 말년까지 험한 꼴을 안 당했는데 리트비노프는 아무래도 자신이 스탈린을 구해줬던 것 때문같다고 농담하곤 했다. [[클리멘트 보로실로프]]도 무명 시절의 스탈린과 친해졌다가 덕 본 케이스. * 스탈린의 의심 때문에 [[연해주]]에 살고 있던 조선인들은 [[중일전쟁]]이 터진 1937년 일본과 내통할 우려가 있다며 강제로 중앙아시아 지역까지 끌려가기도 했으며 그 과정에서 상당한 수의 희생자들이 발생했다. 물론 그들은 [[고려인]]이라는 이름으로 그 곳에서도 나름대로 잘 살고 있기는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의 고통은 엄청났다고 전해진다. [[홍범도]]도 이때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가서 극장 간수로 취업하여 그곳에서 노환으로 별세하였다고 한다. 또한 1941년 [[독소전쟁]] 발발을 틈타 캅카스의 [[무슬림]] [[체첸]]인들이 게릴라 활동을 벌이자 1944년 봄, 체첸인들을 [[나치 독일군]]과 협력했다는 명목으로 인근의 잉구시인과 함께 '''몽땅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켰다.''' 당시 체첸인의 10%가 강제이주 당시 사망했다. 이들은 흐루쇼프 시기가 되어서야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물론 캅카스인이나 고려인만이 타깃은 아니었고,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의 타타르인들도 스탈린에게 밉보여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다. 실제로 독소전쟁 시기에 소련 치하의 동유럽 국가들, 캅카스나 아시아 출신 러시아 포로들을 이용해서 독일군은 후방 관리를 맡겼고 파르티잔들을 때려잡거나 포로 감시소 경비로 쓰기도 했다. 다만 이는 스탈린의 소수민족 정책에 의한 것으로, 이전부터 소수민족에 대해서 강력한 탄압을 일삼고 러시아 중심주의로 동화정책을 강요했으며 중공업화로 지방, 특히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농촌지역이 큰 피해를 보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본인이 소수민족들의 반발을 만들어놓고, 반발이 터지니깐 그걸 빌미로 해서 강제이주까지 시킨 셈이다. * 스탈린의 편집증과 의심증은 나이를 먹을수록 심해졌는데 독소전쟁 개전 직전 시점에서는 히틀러가 크렘린을 매수하서 자신을 암살하려 할지 모른다는 강박에 자신을 지키는 근위병들을 가리키면서 “저놈이 쏘면 내 등 뒤에 쏠거고, 저놈이 쏘면 내 면전에다 쏠 수 있겠군”이라고 시니컬한 농담이 아니라 진지하게 얘기해서 주위를 당혹케 한 적이 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더욱 심해졌다. 드미트리 셰필로프의 증언에 따르면 스탈린이 다차에서 회의를 하다가 잠시 자리를 뜰 일이 있으면 한참동안 회의장 바깥에서 회의장 안을 노려보다가 볼일을 보러 갔는데, 이는 스탈린이 자신이 자리를 뜨자마자 다들 자신을 비난하고 음해할 것이라고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죽기 직전에는 크렘린 의사 음모 사건을 조작하여 자기 주치의들을 숙청하기 시작해서, 주치의들이 고문을 당하고 있었던 관계로 발작을 일으켰는데도 손을 쓸 수 없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말년에는 의심이 너무 심해져서 자신의 충복이었던 베리야조차도 믿지 못했을 정도. 게다가 필생의 숙적인 [[아돌프 히틀러]]의 망령이 씌웠는지, 갑자기 유대인들이 음모를 꾸며 자신을 해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1953년부터 유대인들에 대한 체포 사건이 계속 벌어났고, 스탈린이 죽기 직전에는 "유대인 의사 음모사건"이 소련 신문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유대인 의사들이 스탈린을 암살하려 했다는 것. 이는 [[대숙청]] 당시와 비슷한 패턴이라 소련 인민들은 모두 긴장했으나, 본격적인 숙청이 이뤄지기 전에 스탈린이 사망하므로서 흐지부지되었다. 스탈린 사후 유대인 의사 음모사건이 조작이라며 혐의자를 모두 NKVD에서 풀어준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닌 숙청 실무진인 베리야였다. * 특유의 수염이 트레이드 마크로 유명하다. 수염 탈모가 있었다고 하는데, 유독 턱수염이 나이 들며 빠졌다고 하며 젊은 시절만 해도 턱수염이 많았지만 중년에 접어들며 점차 안 나기 시작했다고.[* 실제로 갱년기 성인 남성들은 이 시기 여성 호르몬이 많이 나오는 경향이 있는데 여성호르몬은 수염을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 여성이 수염이 안 나는 이유가 바로 이 여성 호르몬이 수염을 못 나게 억제하기 때문. 따라서 이 시기 중년 남성들은 수염 탈모에 걸리는 사례들이 있다.] 이후 중노년기에는 우리가 잘 아는 콧수염만 있는 스타일이 되었다. *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조지아]]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평생을 조지아인으로서의 정체성보다는 러시아 민족주의자에 가까운 성향을 보냈다.[* 아이러니하게도 젊은 시절에는 "조지아 민족주의자"라는 비난 섞인 공격을 당 내에서 받은 적이 있었다. 실제 스탈린은 공산주의에 입문하기 이전에는 조지아 민족주의 성향이 강해 조지아 민족주의를 찬양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러시아로 상경한 이후 일상생활에서는 주로 러시아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대숙청 당시에 조지아 민족주의자들을 숙청하기도 했고, 조지아인들이 스탈린과 만났을때 조지아어를 쓰면 아는 체한다면서 화를 내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정치적 성향과는 별개로 조지아 음식이나 와인을 좋아하고 고향 노래를 자주 불렀으며,[* 주로 [[https://www.youtube.com/watch?v=FPjf8E6tk78|술리코 (სულიკო)]]라는 연가를 즐겨 불렀다고 전해진다. 스탈린의 애창곡이라는 연유에서 [[붉은 군대 합창단]]에서도 자주 불리웠으며, [[https://www.youtube.com/watch?v=EiR-HLV7Hks|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불리기도 하였다.] 초대한 손님들에게 조지아 문화를 소개하기도 했다. 또한 조지아에 여러가지 행정적인 혜택을 주기도 했는데 [[압하스]]를 조지아로 재편입시킨것이 스탈린의 공이다.[* 물론 [[대숙청]] 기간 중에 얄짤없어서 조지아에서도 수만명 가량이 죽거나 시베리아로 끌려갔다.(...)] * 본인을 [[아시아인]]이라고 부르는 것을 굉장히 싫어했다. 지금의 러시아에서야 농담 삼아 자신들을 아시아라고 자칭하기도 하지만, 이 당시에는 아시아는 유럽에서도 낙후되거나 이질적인 지역을 뜻하는 비하어로도 많이 쓰였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에서야 동북아 국가들의 경제성장이나 중동권 산유국들로 인해서 낙후된 이미지가 어느정도 희석된 것이지, 20세기 초중반 기준으로는 자체적으로 식민지를 만든 일본 정도를 빼면 아시아 국가들 자체가 식민지였거나 식민지가 되지 않더라도 열강들에게 휘둘렀기 때문에 더더욱 비하의 이미지가 더욱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헝가리와 핀란드도 조상이 아시아에서 오고, 우랄계 언어를 쓴다는 점 때문에 아시아라고 비하되었고, 발칸국가들이나 폴란드 등도 낙후되었다거나 오스만제국이 영향을 받았다는 이유 등으로 아시아 국가라고 많이 비하되었다. 러시아도 예외는 아니라서 영토 자체가 아시아에 걸쳐있는데다가 서유럽에 비해 낙후되었기 때문에 아시아로 폄칭되었다.][* 당연하지만 지금도 유럽인에게 아시아인이라고 하면 싫어하는게 보통이다. 애초에 어느 특종 인종더러 다른 인종같다고 놀리는건 그것 자체로 존재를 부정하는 비하성 / [[인종차별]]성 욕이다. 특히 이러한 욕에 내포된 역사적 뜻은 '''"너희는 유럽인들과 같은 교양있는 민족이 아니라 아시아에서 온 미개한 야만인들"'''이라는 우월의식이 깔려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유럽에서 이러한 욕은 [[동유럽]] 뿐만 아니라 [[훈족]]이라 비하당했던 [[독일인]]들이나 하얀 흑인으로 비하당했던 [[아일랜드인]]처럼 시대와 민족을 가리지 않고 타민족을 비하하는데 즐겨 사용되었다.] 조지아도 서남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나라인지라 러시아인들에게도 아시아라고 자주 비하되기도 했다. 스탈린 본인은 스스로를 아시아인이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 때문에 레닌의 집무실에서 담배를 피우자, 흡연을 혐오했던 레닌은 스탈린에게 "이 아시아놈 같은 작자를 봐! 할 줄 아는건 담배 피우는 것밖에 없잖아!" 라고 하자 분노한 스탈린은 그대로 자신이 피우던 파이프를 창밖으로 집어 던졌다고 한다.[* 정작 레닌 자신은 할머니가 [[칼미크인]]이었다.] * 소련 지도자의 직책으로 알려진 [[서기장|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은 스탈린 시기부터 당 지도자의 직책으로 자리하게 되었는데, 정작 스탈린은 1952년 19차 당대회에서 서기장직을 폐지하고 중앙위원회 서기국 서기로 남았다. 물론 스탈린 사후 서기장직은 '제1서기'라는 이름으로 부활했으며, 이후 '서기장' 직책은 소련이 해체될때까지 소련과 소련 공산당의 지도자 직책으로 자리했다. * 1941년 8월 최고 사령부 명령 제207호(후퇴자 즉결 처분 명령), 1942년 7월 국방 인민 위원회 [[명령 제227호]]([[형벌부대]] 창설 명령) 등의 악명 높은 명령을 내렸다. * 방첩부 [[스메르쉬]](СМЕРШ)는 스탈린이 직접 명명한 이름인데, 그 뜻은 "스파이에게 죽음을!"(смерть шпионам! = 스메르찌 쉬피오남!)의 앞글자를 따서 지은 것이다. 이를 한국어로 의역하면 "살[[첩자|첩]]사령부" 내지는 "살[[간첩|간]]사령부"가 된다. * [[혁명가]] 시절에는 여자를 꼬시는 재주도 남달라서 여성편력으로 유명했고, 사생아도 둘 정도였지만, 막상 집권 후에는 바람피는 일 하나 없이 조용히 지냈고, 둘째 아내인 나데즈다 알릴루예바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후로 두 번 다시 결혼하지 않았을 정도였다. 이는 [[NKVD]], [[KGB]]의 국장으로 재임한 측근들인 [[겐리흐 야고다]], [[니콜라이 예조프]], [[라브렌티 베리야]] 등이 벌인 엽색 행각과 대비되는 것으로 스탈린 특유의 편집증적인 성격이 엄격한 자기 통제에까지 이른 것으로 평해진다. * 사생활은 [[초강대국]] [[소련]]의 무소불위의 권력자였던 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굉장히 검소하고 담백하게 살았다. 물론 필요한 물건이 말 안해도 알아서 진상되고 따로 별장([[다챠]])이 배정되어 휴가철에는 별장에서 유유자적하게 보내는 등 방 하나를 빌려살던 것이 보통인 일반 도시민에 비하면 많이 풍요로운 삶을 살았고[* 소련 도시민들이 방 여러개 있는 [[아파트]]에서 살게 된것이 1950년대 이후의 일이었고, 스탈린 당시에는 도시 지역에서 방 하나 정도를 배정받아 사는 것이 일반적으로 많은 경우에는 화장실과 욕실, 주방을 이웃집과 공유했다.] 주치의와 요리사, 관리인들이 배정되어 괜찮은 식사와 의료혜택을 누리긴 했다.[* 다만 말년에 그 주치의들을 감옥에 보내버렸고, 정작 이 때문에 쓰러졌을 때 응급처치에 실패해서 더 일찍 사망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정도는 횡령과 사치로 나라를 말아먹는 독재자들이 많다는 것을 감안하지 않아도 민주주의 국가의 국가원수들도 다들 품위 유지로써 받는 혜택이라 도를 넘는 사치라고 할 수도 없었다.[* 이와 비슷하게 [[우루과이]]의 [[호세 무히카]] 전 대통령의 검소함을 보여주는 에피소드 중 하나가 [[운전기사]]가 딸린 [[리무진]]을 거부하고 본인이 직접 [[폭스바겐 비틀]]을 몰고 다니는 것이다. 물론 무히카 본인이 검소한 것 자체는 사실이긴 하나, 그만큼 국가원수에게 개인 운전기사는 필수불가결한 존재처럼 여겨진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어찌나 금전 욕심이 없었는지, 다달이 나오는 월급도 받는 그대로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는 했다.[* 한 번은 측근들과 함께 모스크바 시내를 순방하던 중 길을 건너려던 노파를 도운 적이 있는데, 노파를 불쌍히 여긴 스탈린이 돈을 주려다가 자신을 포함한 측근 전원이 평소에 돈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서 결국 주지 못한 일이 있었다.] 평소의 옷차림도 수수한 [[인민복]]이나 [[군복]]이 대부분이었다. 입는 코트는 [[10월 혁명]] 직후에 구한 것이었다. 그나마 사치라고 즐긴것이 술담배를 좀 비싼것을 피는 수준이었다, 술은 조지아,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생산하는 와인 및 브랜디를 선호했으며, 담배의 경우 당대에 고급품으로 평가받는 헤르체고비나 플로르[* Герцеговина Флор. 직역하면 '헤르체고비나의 꽃'이란 뜻이다. 이름과는 달리 제정 러시아 시절부터 모스크바에서 생산한 담배이다. ] 담배를 피웠다. 그 외에 미국제 담배인 '프린스 알버트' 등을 피우기도 했다. 스탈린 사후 그의 재산을 확인해 본 결과 '''여러 개의 [[담배]] [[파이프]][*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파이프가 망가질 것을 대비해 예비용 파이프를 몇 개 구비해 놓는다. 스탈린이 사치를 한게 아니라, 파이프 흡연자로서 당연한 행동을 한 것.], 코트 6벌, 바지 10벌, 저금 90 루블'''이 전부였고 부동산, 차명 은행 계좌, 보석은 전혀 없었다. 유명한 반(反) 스탈린 역사학자인 올레크 흘레브뉴크 그도 스탈린이 물질적 풍요나 사치에 큰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에 동의했는데, 그는 스탈린이 추구한 욕망은 [[돈]]이나 [[성욕]]같은 원초적인 욕망보다는 '''순수한 [[권력]] 그 자체'''에 가까웠을 거라고 평했다.[* 이와 비슷하게 [[에리트레아]]의 독재자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도 에리트레아를 [[북한]]도 능가한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억압적인 독재국가로 만들었지만 정작 본인은 사치를 거부하며 검소하게 살고 있다.] * 사소한 일까지 다 기억해 복수하기로 유명했지만 동시에 은혜도 아주 사소한 것 하나까지 다 기억해가며 갚아주었다. 유배 시절 편의를 봐준 경찰관이나 탈출할 때 마차에 태워준 마부, 신학교 시절 불온 서적을 들켰을 때 자신의 것이라며 보호해준 친구 등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좋은 직장을 알선해주거나 [[금일봉]]을 내려 보답했다. 민족인민위원회 위원 시절 알고 지내던 캅카스 민족주의자를 숙청 대상자 명단에서 빼내 준 적도 있다. * [[스탈린]]은 종종 어떤 지휘관의 무능이 귀에 들어오면 '''"그 자의 콧잔등을 갈겨주었나? 다시 그런 짓을 하면 정통으로 갈겨주게."'''라고 소리치곤 했다. [[내리갈굼|당시 붉은 군대에서는 국방 인민 위원이 장군을, 장군이 다시 자신의 부하를 구타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 1941년 겨울 독일군의 [[모스크바 전투|모스크바 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히틀러]]는 이듬해 공격의 목표를 소련 남부의 유전지대 카프카스로 변경하였다. 이에 스탈린은 석유생산부장 [[https://en.wikipedia.org/wiki/Nikolai_Baibakov|니콜라이 바이바코프(Nikolai Baibakov)]]에게 이렇게 지시했다.[[https://m.blog.naver.com/donmany0203/30129328850|#]] >바이바코프 동지, 배신자 히틀러가 카프카스를 향해 돌진하고 있소! > >[[히틀러|그]]는 카프카스를 손에 넣지 못하면 전쟁에서 진다고 선언했지. 따라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석유가 독일군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아야 하오. 명심하시오! > >'''[[석유]]가 한 방울이라도 독일군 손에 들어가면 당신은 총살이오. 하지만 너무 서둘러 유전을 파괴해서 독일군도 석유를 얻지 못하고 우리도 연료를 얻지 못한다면, 그때도 당신은 [[총살]]이오.'''[* 다행히 바이바코프는 97세가 되는 2008년까지 살았다.] ||[[파일:external/totalitarism.ru/stalin_icon_large.jpg|width=100%]]|| * 스탈린의 [[이콘]] --거 엄지손가락에 힘 푸십쇼.-- [youtube(zqyRoke3TAI, width=400)] * 1952년 전당대회 연설. [[얄타 회담]]의 사진처럼 서방기자들이 찍은 일부를 제외하면, 스탈린의 사진이나 영상은 보정된 것이 대다수다. 위의 동영상은 가공 처리 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얼마 안되는 영상. 위 영상에서 턱을 괴는 등의 행동이 보이는데 이는 지루해서라기보다 동시통역 등으로 인해서 그냥 머리를 앞으로 내민 행동으로 추측된다. 뛰어난 연설 능력을 가졌다고 평가되는 [[레프 트로츠키]]나 [[아돌프 히틀러]][* 엄밀히 말해서 히틀러의 경우, 연설 자체의 내용은 매우 단순했다. 그는 제스처, 말의 톤과 투, 특히나 무대설정이라는 연설 내용 외적인 요소를 이용해 청중들의 감정적 자극을 이끄는데 능숙했다. 요즘 언어로 청중들이 원하는 "사이다"적 발언과 메세지 내용을 전달하는 능력 및 개인의 카리스마로 청중들을 선동하는 능력이 뛰어났던 것. 따라서 히틀러의 연설들은 이러한 연설 내용 외의 요소들을 배제한 상태로는 그다지 특기할 만한 것이 없고 오히려 말이 산만한 경우가 많다. 파시즘 진영에서는 히틀러보다도 [[베니토 무솔리니]]와 [[파울 요제프 괴벨스|괴벨스]]가 연설 구성과 내용이 더 나았다] 등과는 반대로 이오시프 스탈린은 원래 [[조지아]] 출신으로 [[러시아어]]가 모국어가 아니었기 때문에 억양이 없고, 그냥 [[국어책 읽기|기계처럼 원고를 읽는 수준]]에 불과했다고 한다. 그러나 말하는 것보다 내용을 중요시해서 실제 청중들의 관심을 많이 끈 편이었다고 한다. *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이 보내준 [[코카콜라]]를 마시고는 그 맛에 감탄했다고 한다. 다만 미국에서 만든 음료수가 이렇게나 맛이 좋다는 것에 약이 올라서 수입 금지를 때려버리고, 이후 식품화학자 미트로판에게 [[배(과일)|배]]를 원료로 해서 콜라를 능가하는 음료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이 때문에 콜라에 푹 빠진 [[게오르기 주코프]]는 직접 콜라를 밀수입해 마셔야 했다. * 말년에 러시아에 대해 병적으로 집착해 인류의 모든 위대한 유산은 소련과 러시아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역사 왜곡을 하려 들었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의 문제점>이라는 책을 직접 저술해 '러시아 민족 언어'의 기원이 쿠르스크와 오룔 지방에서 발견되었다는 주장을 했다. * [[제2차 세계 대전]]에 [[미국]]이 참전하기 전까지 [[독소 불가침 조약]], 독재 정치 등으로 인해 미국내에서 스탈린에 대한 이미지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독소전쟁]]이 발발하여 소련이 미국과 함께 독일과 맞서 싸워야 하는 입장이 되자 미국은 스탈린에게 '조 아저씨(Uncle Joe)'라는 애칭을 붙여 대대적인 긍정적 선전을 했다 [[http://sonnet.egloos.com/3392236|#]]. 그러나 [[얄타 회담]]에서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경직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스탈린에게 '미국에서는 당신을 이렇게 부른다'라고 알려주엇지만 스탈린은 상술하듯이 경박한 농담을 즐겨하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불쾌해했다고 한다. * 스스로를 '''강철의 사나이'''라 자칭했지만 실제로는 [[고소공포증]] 환자여서 1943년 [[테헤란 회담]] 참석을 위해 비행기를 탄 것이 스탈린 인생 최초의 비행이었다고 한다. 테헤란 회담 당시 스탈린이 탄 비행기가 난기류에 휩쓸리는 바람에 심한 멀미를 겪었는데 한동안 [[모스크바]]에 '대원수 동지'가 심한 멀미에 시달린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얄타 회담]]도 얄타에서 하게 된 이유가 비행기를 타기 싫어서 그랬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소문으로, 실제로는 스탈린의 주치의가 '이 상태로는 멀리 못 간다'고 권고했기 때문이었다. *[[얄타 회담]]에 참석할 때 스탈린은 FD 3878라 불리는 특별 열차를 타고 갔는데 가는 동안에도 일할 수 있도록 꾸몄다. 83톤이나 나갈 정도로 중무장한 기차 내에는 서재와 거실, 화장실, 부엌, 경호실까지 있어 움직이는 크렘린 사무실 같았다고 한다. * [[워커홀릭]]으로 아주 세세한 일까지 본인이 다 처리해야 만족했다고 한다.[* 심지어 별장의 농작물 관리하는 것까지 수첩에 다 적어놨다.] 이른바 만기친람(萬機親覽)형. 그런데 주로 밤까지 일하고 새벽에 잠을 자고는 다음날 오전중에 늦게 일어나는 스탈린의 업무 스타일에 맞추느라고 장관부터 하급 공무원들까지 새벽에도 일을 해야했다. 문제는 다음날 일어나고 싶은 시간에 일어나던 스탈린과 달리, 다른 사람들은 '''평일 근무시간대에 일어나서 업무를 또 해야 됐기에''' 잠도 못자고 근무를 계속 해야했고, 그 와중에 스탈린이 술 권하면 술도 마셔가며 일을 해야해서 과로와 음주로 건강을 심하게 망쳤다. 게다가 스탈린은 아랫사람들의 일 처리에 조금이라도 실수가 발견되면 바로 숙청해 버리고 새 인물을 들여서 말 그대로 부하들이 죽어나갔다. * [[반유대주의]]적 성향이 있었다. 물론 당시 소련 공산당 내에서 유대인 혈통을 가진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돌프 히틀러]]처럼 '유대인은 다 죽어야 한다' 정도는 아니었고, 측근 중에서도 유대인이 있기는 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스탈린은 유대인들이 국가나 당이 아닌 유대 민족과 종교 그리고 [[이스라엘]]에 충성한다고 믿었다. 치매증상을 보이던 말년에는 유대인들이 자길 해치려 한다고 믿어 '유대인 의사 음모 사건'을 벌이기도 했다. 다만 소련이 세계최초로 유대인차별금지법을 만든 나라니 만큼 공개적으로 드러내진 않는 편이었고, 나름대로 유대인을 신경써준답시고 [[유대인 자치주]]를 만들기도 했으며 이스라엘 건국을 지원해주기도 했다.[* 원래는 러시아 서남부 일대에 만들려고 했지만 현지인들의 반발이나 극동지역 개발을 고려해서 극동지역에다가 설치했다. 그러나 인구밀집 지역인 소련서부와 너무 멀리 떨어진데다 유대인들을 유대인 자치주로 강제이주를 내보낸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많이 오지 않았다. 그나마 있던 유대인들도 현대에는 대다수가 해외나 대도시로 이주한지라 말로만 유대인 자치주인 상황이다.] 이외에도 독소전쟁 당시에는 유대인들을 동쪽으로 대규모로 대피시켜서 목숨을 건지게 했고, 유대인의 적인 히틀러를 박살냈기에 많은 유대인들에게는 생명의 은인이기도 했기는 했다. 유대인들에게는 양면적인 인물이었던것이다. * 총기를 다루는데에 서툴렀는지 실수로 사람을 죽일 뻔 한 적이 몇 번 있었다고 한다. [[참새]]를 쫓겠다며 총을 들고 설쳐대다 경호원 한 명이 맞았다는 말이 있고, 또 한 번은 오발로 미코얀을 죽일 뻔 했으나, 간발의 차로 살았던 적이 있다. 그런데도 스탈린은 주변에 자신을 사격의 명수라고 자랑했다. * [[헝가리 인민 공화국|헝가리]] 공산당 서기장 라코시와 관련된 일화도 있다. 한 번은 스탈린이 캅카스로 쉬러갔는데 라코시가 찾아와 스탈린의 측근들과 술을 마셨다. 이때 스탈린의 측근들은 스탈린과 술을 마시듯 라코시와도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과음을 했는데 이걸 본 라코시가 '이게 무슨 꼴이냐'며 그들을 비난한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라브렌티 베리야|베리야]]는 그대로 스탈린에게 달려가 고자질을 했고, 그 대가로 라코시는 그날 저녁 열린 스탈린과의 만찬에서 만취할 때까지 강제로 술을 마시게 됐다고 한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도망쳤다고 한다. * 스탈린은 별장에서 [[즈다노프]]의 피아노 반두에 맞춰 [[몰로토프]], [[보로실로프]]와 노래하는 것을 좋아했다. 몰로토프는 음악을 좋아하는 집안에서 자라 바이올린과 만돌린을 연주할 수 있었고, 보로싈로프는 목소리가 근사했다고 한다.근데 부르는 노래가 어릴 적 부르던 찬송가(...)였다고 한다. * [[사담 후세인]]은 개인적으로 스탈린을 존경했다고 한다. * 한 번은 페클라 코르슈노바라는 70세 노인이 스탈린에게 암소를 선물해 보내자 직접 답장을 써줬다. >'''"어머님, 다정한 편지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농장이 없어 소가 필요 없습니다. 저는 완전히 국가에 고용된 사람이라 최선을 다해 국민에게 봉사하지만, 고용된 사람은 농장이 없답니다. 어머님, 제 생각에는 제게 소를 선물하지 말고 계속 기르면서 저를 기억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실제 스탈린은 농장이 있었으나, [[다차]]에 달린 조그마한 텃밭 정도로 소가 필요할 정도는 아니었다.] * 선전 영화 [[베를린 함락]]에서 취미가 나무 심는 걸로 나오는데 사실이다. [[소치]]에 있는 스탈린 별장에는 24만㎡의 녹지가 있었고, 조경과 농사를 직접 감독했다. 감귤나무를 위한 온실을 설계하고 포도밭 설치를 감독했으며 직접 수박을 재배했고 연못에 물고기를 키웠다. 가끔 모스크바 상점에 직접 키운 수박을 출하했다. 그 외에도 말, 염소, 병아리, 오리, 작은 양봉장도 있었다. 물론 전부 다 직접한 건 아니고 별장 관리인들에게 시키기도 했는데 관리책임자 P. V. 로즈가초프 중령에게 내린 수백가지 지시사항이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 1950년 4월 7일: a) 5월 10일부터 모판에 수박과 멜론을 심을 것. b) 7월 중순에 수박과 멜론 덩굴을 잘라줄 것. > 4월 20일 :...주방에서 연못으로 통하는 길을 따라 전나무를 심을 것...주 건물 옆, 그리고 연못 옆 정자 쪽의 사과나무들 사이에 0.5미터 간격으로 옥수수를 심을 것. 이 곳에 콩도 심을 것...텃밭 가장자리에 가지, 옥수수, 토마토를 심을 것.[* 스탈린: 독재자의 새로운 얼굴 32쪽, 올렉 V. 흘레브뉴크, 유나영 역, 삼인, 2017] * 소련군 총참모장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의 아버지는 [[동방정교회|러시아 정교]] 신부였는데 당시 종교인은 지위고하 불문하고 죄인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바실렙스키는 언젠가 스탈린과 같이 식사할 때 스탈린이 아버지의 안부를 묻자 [[처세술|"인민의 적과는 상종하지 않아서 모른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스탈린은 오히려 "아무리 그래도 아버지인데 그러는 건 아니다."라면서 바실렙스키에게 아버지와의 화해를 종용했다. * [[1945년]]과 [[1948년]] [[노벨평화상]] 후보가 된 적이 있다. [[파일:mausolee_lenine_staline.jpg]] * 사후에 레닌과 마찬가지로 [[엠버밍]] 처리되어 훗날의 [[김정일]] 마냥 [[붉은 광장]]의 [[레닌 영묘]]에 합장되었으나,[* 이 때 묘의 이름도 레닌 스탈린 영묘로 바뀌었다가 1962년에 다시 레닌 영묘라는 이름을 되찾았다.]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후에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석방된 도라 라주르키나라는 나이 많은 볼셰비키가 [[크렘린]]에서 "꿈에 [[레닌]]이 찾아왔는데 '''스탈린 보고 방 빼랍니다.'''"라고 연설을 하자 스탈린을 빼는 것이 심각하게 고려되었다. 결국 시신은 화장되어 레닌 영묘 바로 뒤에 있는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됐다. 모욕하기 위함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방부 처리를 중단한 후, 바로 화장하지 않고 뜸을 들이는 바람에 스탈린의 시체가 많이 부패했다고 한다. 그러나 크렘린 벽 묘지도 국가에 기여한 인물들에만 수여되는 상당한 영예인데,[* 스탈린 외에도 [[막심 고리키]], [[유리 가가린]], [[게오르기 주코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등 소련의 쟁쟁한 위인들이 다수 묻혀 있다.] 스탈린의 업적을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급진적이라는 평을 받는 20차 전당대회 연설에서조차 시도되지 않은 것이다. 이후 1970년 브레즈네프 집권기에 흉상이 제작되어 벽 묘지 앞에 세워졌다. ||[[파일:external/globetrotterblogdotnet.files.wordpress.com/image69.jpg|width=100%]]|| * 스탈린의 동상은 1960년대 초중반에 걸쳐 대부분이 철거되었지만, 1960년대 중반 이후로는 철거가 중단되었으며, 1990년대에는 조지아에서 스탈린이 조지아 출신에 소련을 초강대국으로 만든 인물이라는 이유로 오히려 동상 수십개가 제작된 시절이 있었다. 위 사진과 같이 모스크바 [[크렘린 벽 묘지]]에는 스탈린의 석상이 하나 남아있으며, 그의 고향인 조지아 고리 시청 앞의 거대 동상은 철거되었으나 스탈린 박물관[* 스탈린의 생가가 있던 자리이다.] 내에도 또 다른 스탈린의 동상이 있고 [[볼고그라드]]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파노라마 박물관에도 버젓이 전시되어 있다. 현재도 스탈린의 벽 묘지 앞에는 소련 시절을 그리워하는 참배객들이 매일 찾아와서 꽃을 놓고 간다고 한다. * [[6.25 전쟁]]은 스탈린이 지시한 것이라고 추정되어 왔지만, [[흐루쇼프]]의 회고록이나 [[소련 붕괴]] 후에 열람할 수 있게 된 문서 등을 통하여 밝혀진 바로는 스탈린은 [[미국]]과의 전쟁이 일어나는것을 원하지 않았고, [[6.25 전쟁]]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 당시 소련이 산업복구는 얼추 완료된 상태였지만 인적자원적인 면에서 2차 세계대전에서의 충격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미국과 맞설려면 추가적인 경제성장 및 인적자원 복구가 완료되어야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실제 소련의 인구복구는 1955년에 이루어졌다. 하지만 사회주도층의 성비는 1960년대까지도 여성이 우위로 1930년 ~ 40년대 초반생이 주류를 이루고 거기에 전후 베이비붐 세대들이 사회활동을 시작할때가 되어서야 겨우 균형을 이룬다.] 하지만 [[김일성]]은 북한이 남한은 물론, 중국과 대만, 일본보다도 경제정상화에 일찍 성공한데다가 이승만의 지지율이 낮은것에 고무되어[* [[2대 총선]]에서 친 이승만파의 의석이 210석 가운데 1/4 수준인 57석에 그쳤을 정도였다.] 군사를 일으키면 쉽게 함락시켜서 통일을 해낼것이라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에 빠져있었고 이 때문에 무려 '''49번'''이나 전쟁승낙을 졸라대는 바람에 마지못해 승낙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북한]]에 대한 지원은 미적지근하기만 했다. 게다가 당시 스탈린이 승낙한 건 옹진 반도에 대한 국지전이었지, 전면 남침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북한]]이 패망 직전의 상황에까지 몰렸는데도 스탈린은 [[미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소련군이 직접 개입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려 했지만 북한과 [[중국]]의 공군력이 너무나 형편없어서 마지못해 소련 공군의 참전은 허락했다고 한다. 대신, 이 사실이 들통나지 않도록 '미그앨리'라고 부르는 북한의 북부 상공에서만 비행하도록 했고, 교신에 [[러시아어 사용 금지|러시아어를 쓰지 말라고]] 단단히 주의를 줬다고 한다.[* 문제는 전투중 급박한 상황에서 이들이 무전기 너머로 내뱉는 러시아어가 UN군 측에도 감지 되었고, 공중전중에 전투기 콕핏안의 탑승자가 보일 정도로 접근했던 몇몇 미군 조종사들이 러시아인인 것 같다고 증언하여 미국 역시 소련 공군이 참전했다는 사실은 알게 된다. 그러나 미국 역시 소련과의 직접적인 대결은 원하지 않았기에 비밀로 처리하고 일부러 모른척했다.] * 다만 전쟁 초기가 지난 이후로는 6.25 전쟁을 지속하는것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으로 선회했다. 이는 북한군과 중국군이 몸빵을 맡으면서 소련군의 출혈을 최소화하는데 성공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전투력이 크게 소모되지는 않았지만 6.25 전쟁 판세가 지지부진 해지면서 반전여론이 커진데다가, 영국도 배급제가 아직 시행되었던 시절이라 큰 전쟁을 벌일 여력이 없었고, 프랑스는 전후복구를 시작한 상황에서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고 알제리와 베트남 식민지에서 전쟁을 시작하는것을 선택했기 때문에 6.25 전쟁을 마냥 지속할만한 형편이 안되었기 때문에 스탈린 입장에서는 서방국가들의 전투여력을 빼는것 자체는 성공을 거두었던것이다. * 말년에는 뇌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정신병적 행태를 보이기도 하였다. 흐루쇼프의 회고에 따르면 개의 울음소리를 녹음한 레코드를 틀어놓고서는 정치국(폴리트뷰로)의 일원들을 춤추게 하였는데, [[니키타 흐루쇼프|흐루쇼프]], [[게오르기 말렌코프|말렌코프]], [[니콜라이 불가닌|불가닌]],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몰로토프]], [[게오르기 주코프|주코프]] 같은 자들이 구두를 벗고 개 울음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는 장면은 장관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흐루쇼프는 춤을 아주 못 추어서 웃음거리가 되었지만, 몰로토프는 상당한 춤꾼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춤판에 딸 스베틀라나를 데려와 실신할 때까지 춤을 추게 했다는 말도 있다. 이는 냉전시대의 선전이 아니라 드미트리 볼코고노프[* 1928-1995. [[정치장교]]이자 구소련 심리전부서의 책임자였으며 장성까지 승진했던 인물로, 후일에는 역사가로서 맹활약하였다. 만나본 사람의 평가에 의하면 꽤나 공산주의 사회의 고위층답지 않게 자유롭고 유연한 사상을 가졌다고 하며 나중엔 스스로도 공산주의를 비판하기도 했을 정도이다. 근데 이 사람은 아버지가 대숙청 때 숙청되었기 때문에 원래 공산주의를 좋게 볼 수 없는 사람이다. 원래 공산권은 북한을 빼고 연좌제가 없고 아주 중요한 고위직의 경우에나 예외적으로 이용되었다.]의 책에 실린 내용이다. 높으신 어른들이 이런다는 게 웃기긴 하지만 남녀노소 술 퍼먹고 미친듯이 춤추는 건 러시아의 고유의 미풍양속이긴 하다.[* 우리나라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는데 [[정조(조선)|왕이 이러기도 했다. 또는 조선 태조가 개성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뒤의 만찬에서 공신인 정도전, 조준 등게 함께 신나게 춤추며 놀았다는 기록도 있다. 용의눈물에서 잘 묘사된다.]]. 차이점이라면 꽐라가 되는게 목표라서 왕과 주변 인물들은 춤은 커녕 몸겨누기도 힘들어 했다랄까.] 서비스의 서술에는, 죽기 전날의 파티에서 스베틀라나에게 춤을 추자고 했지만 스베틀라나가 싫다고 하자 스베틀라나의 뺨을 사정없이 갈긴 다음에 머릿채를 잡고 파티장에서 마구 끌고다녔다고 한다. 주변에선 스베틀라나를 동정어린 시선으로 보면서도 감히 스탈린을 말리진 못했다고. 그런데 해당 일화의 원전인 흐루쇼프 회고록에는 이것도 나름대로 스탈린의 애정의 표현이었다고 평가했다. --뭐요?-- * 스탈린은 디너 파티에서 장난을 자주 쳤는데 술잔에 포도주 대신 보드카 붓기, 음식이 든 접시에 후추 뿌리고 휘젓기, 의자 위에 토마토 두기 등이였다. 그런 장난에도 초대된 간부들은 긴장을 놓을 수는 없었는데, 스탈린이 항상 감시하고 트집을 잡기를 원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 볼코고노프의 책에 실린 또다른 회고들에 따르면 스탈린은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었는데, 친지, 심복들과 같이 코미디 영화를 보러 가서는 웃으면서 '''같이 보면서 웃던 사람들의 유배문서에 서명하곤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국 회의 도중에 갑자기 한 명을 지목하여 ''''당신은 스탈린 동지에게 무엇을 숨기고 있나?'''' 등의 얼토당토 않는 질문을 던지는데, 그 순간부터 그 사람의 목숨은 경각에 달리게 된다는 것이다.[* 레드얼럿 1편의 소비에트 미션9 오프닝 컷신에서 이게 패러디되었다. 그라덴코 장군과 함께 보드카를 들이키며 화기애애하게 유배문서에 서명했지만 다음미션에서 쿠코프와 정부인 나디아에게 독살당했다.] 하지만 저 내용이 신뢰성이 높은 편은 아니다. 실제로 볼코고노프의 책은 좀 과장되었다는 이야기가 많은데 러시아 역사학계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았었다. * 니키타 흐루쇼프의 "스탈린 덕분에 이긴 게 아니라, 스탈린이 있음에도 이겼다"라는 말이 유명해 히틀러처럼 군알못 정치인 취급을 받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흐루쇼프의 평은 지나친 저평가라는게 주류 의견이다.[* 이런 평은 동서를 가리지 않고 인정하는 사실이다. 예: 리처드 오버리著 <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 독소전쟁 초기에는 현장 지휘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등 실책을 많이 저질렀지만, 이후에는 개심해 군의 문제는 전문가인 군인들에게 일임하고 본인은 독재권력을 이용해 국력을 전쟁에 효율적으로 투사하도록 지시하는 등, 마지막까지 과도한 개입과 측근들의 전횡을 눈감아주어 독일군의 전쟁 수행 능력 저하에 큰 축을 담당한 히틀러와 스탈린을 비교하는게 실례일 정도. * 스탈린 사망 후 그의 블리즈냐야 별장의 서랍에서 나온 세 장의 편지가 유명하다. 편지는 신문지에 싸여 있었고, 각각 [[요시프 브로즈 티토]], [[니콜라이 부하린]], [[블라디미르 레닌]]이 보낸 편지이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 Стаљину > прекини са слањем људи да ме убију. Ухватили смо их већ пет, једног од њих са бомбом, другог са пушком... ако не престанеш слати убице, ја ћу послати једног у Москву и нећу морати да шаљем другог. >스탈린 씨에게 >이제 날 죽이려고 [[암살자|사람]]을 보내지 마십시오. 우리가 벌써 다섯 명을 체포했는데, 하나는 [[폭탄]]을 가지고 있었고 하나는 [[소총]]을 가지고 있었더군요... 만일 또 다시 살인자를 보낸다면, 그때는 내가 모스크바로 하나 보낼 건데, '''나는 두번 보낼 필요는 없을 겁니다.'''[* 티토의 모국어였던 [[세르보크로아티아어]]로 된 편지이다. 러시아어 번역본은 다음과 같다. "Сталину: перестань подсылать мне убийц. Мы уже поймали пятерых, одного с бомбой, другого с винтовкой… Если не перестанешь присылать убийц, то я пришлю в Москву одного, и мне не придётся присылать второго."] > ----- > Коба, зачем тебе нужна моя смерть? > 코바, 어째서 나의 죽음을 원하는 거지? > ----- > Уважаемый т. Сталин, > Вы имели грубость позвать мою жену к телефону и обругать ее. Хотя она Вам и выразила согласие забыть сказанное, но тем не менее этот факт стал известен через нее же Зиновьеву и Каменеву. Я не намерен забывать так легко то, что против меня сделано, а нечего и говорить, что сделанное против жены я считаю сделанным и против меня. Поэтому прошу Вас взвесить, согласны ли Вы взять сказанное назад и извиниться или предпочитаете порвать между нами отношения. > С уважением, Ленин. > 5-го марта 1923 года. > 존경하는 스탈린 동지. > 당신은 내 아내에게 전화하여 욕설을 하는 무례를 범했소. 비록 아내가 그 일을 잊자는 당신의 말에 동의했을지라도, 이 사실은 그녀에 의해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에게 알려졌소. 나는 내게 적대적인 행위를 그렇게 쉽게 잊을 생각이 없는데, 아내에게 적대적인 행위는 내게 적대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소. 그러므로 동지에게 청하건대, 동지가 했던 말을 취소하고 사과하든가, 아니면 우리 사이를 끝내는 것을 선택하든가를 저울질해보기 바라오. > 경의를 표하며, [[블라디미르 레닌]]. > 1923년 3월 5일 각각의 편지에 관해 로버트 서비스는 티토의 편지를 보관한 이유는 배짱이 마음에 들어서, 부하린의 편지는 애정 때문이 아니라[* 서비스는 애정 설을 "거부"한다고 밝혔다.] 부하린을 숙청할 때의 만족감을 되새기기 위해서, 레닌의 편지는 마음에 상처를 받아서였을 거라고 평했다. 이에 관해 티토와 레닌의 편지는 대부분이 서비스의 평에 동의하지만, 부하린의 경우에는 스탈린이 부하린의 유언만 보관한 것이 아니라 굳이 보관할 이유가 없었던 회고록도 같이 보관하고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서비스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어렵잖게 찾아볼 수 있다. 로버트 서비스가 '부하린에 대한 스탈린의 애정 때문이라는 평가를 '''거부'''했다는 부분에서 알 수 있듯, 스탈린이 이 편지를 굳이 간직한 이유는 부하린에 대한 특별한 감정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의견이 많다. 부하린은 스탈린과 매우 절친한 친구이자 혁명 동지였으며, 편지에 나오듯이 죽임을 당하는 마지막 순간에도 분노나 억울함을 호소하기 보다는 왜 굳이 나를 죽이려 하냐는 당혹감을 보일 정도였다. 애정 설의 논거는 부하린을 숙청했을 당시의 만족감을 되새기는 용도로는 유언장 하나로 충분하며, 세상 그 어떤 독재자도 자기에게 자기 손에 [[숙청]]을 당한 정적의 회고록을 멀쩡하게 보관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다만 '''"세상 그 어떤 독재자도 자기 손에 숙청당한 정적의 회고록을 멀쩡하게 보관해주지는 않는다."'''라는 관점은 지나치게 단정적이고 상당한 이론의 여지가 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스탈린의 유품중에는 부하린과는 비교도 안되는 최대 정적이었던 [[트로츠키]]의 저서인 <테러리즘과 공산주의>가, 그것도 꼼꼼히 밑줄까지 쳐 가며 읽은 상태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개인의 삶의 기록을 담은 회고록과 정치적 주의주장을 담은 이론서는 다르다'고 말할수도 있겠지만 어쨌건 스탈린은 정적의 책이라고 해도 읽고 내용을 받아들이는데 별다른 거리낌이 없는 인물이었다고 볼 수 있다. (덤으로 스탈린은 '''"테러리즘, 즉 폭력을 통한 공포가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하는 데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는 트로츠키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다 못해 트로츠키와 레닌의 시대와는 다른 차원으로 발전(?)시킨 인물이기도 하다.) 이 점에서는 다양한 정보적 가치를 가진 서적보다는 오히려 '개인에게 전하는 메시지'임이 분명한 편지를 보관해 두었다는 점, 특히 함께 발견된 다른 두 점의 편지가 승리의 만족감보다는 씁쓸한 자조를 불러일으키게 할 만한 내용이라면 그 두점과 함께 보관된 편지 역시 스탈린에게 비슷한 성격을 가졌을 것이라 추정해볼수도 있다.][* 물론 반대로 '승리감 설'에도 뒷받침할만한 나름의 정황적 근거는 있다. "왜 스탈린에게 있어 최대최강의 정적이었던 트로츠키도 아니고, 레닌그라드의 소비에트 의장 및 코민테른의 집행위원으로 경력상 윗줄이었던 지노비예프나 카메네프도 아닌 부하린의 편지를 보고 승리감을 얻으려 한 것이겠냐?"고 묻는다면, 정치국 내 주요 경쟁자들을 하나씩 쓰러트리며 [[절대권력]]을 향해 달려가던 스탈린의 행보에서 마지막으로 쓰러트린 적이 바로 부하린이었다는 점이다.] 아무튼 이제는 애정이건 만족감이건 이유를 알 수 없다. 참고로 레닌의 편지에 대해서는 흐루쇼프의 회고록에도 언급되는데 스탈린이 죽은 후 서랍에서 그 편지가 나온 것을 보고 정말 놀랐으며 스탈린이 그걸 끝까지 보관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고 써놨다. 그리고 스탈린이 아마도 그 편지를 없애버리지 않은게 그 편지의 존재를 까먹어서가 아닐까 하는 추측을 남겼다. * 유명한 피아니스트 마리아 유디나가 스탈린상과 2만 루블의 상금을 받게 되자 스탈린을 훈계하는 편지를 보냈다는 야사가 유명한데, 문서고 조사 결과 유디나가 스탈린상을 받기는커녕 스탈린상 후보에도 오른 적도 없으며, 볼코프의 증언에서 베껴서 창작한 일화임이 밝혀졌다. 어쨌든 이 도시전설에 따르면 유디나가 보낸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는데 창작임을 감안하고 읽자. >고맙습니다,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당신의 도움에 대해서. 난 당신을 위해서 밤낮으로 기도하겠습니다. 주님께 당신이 사람들과 국가에 끼친 큰 죄악을 용서해 달라고 청하겠습니다. 주님은 자비로우신 분이므로 당신을 용서하실 겁니다. 난 돈을 내가 다니고 있는 교회에 기부하였습니다.” 스탈린의 죽음을 다루면서 관련 도시전설과 야사들을 거의 다 써먹은 블랙 코미디 영화 [[스탈린이 죽었다!]]에서는 이를 좀 더 각색해서 마리아가 '당신은 조국을 배신하고 인민을 짓밟았다. 이 폭군아.'라고 대놓고 독설하고, 스탈린은 이 편지를 읽고 기가 막혀서 실소하다가 쓰러져 죽는다. * 스탈린의 성관계에 관한 여러 소문이 있다. 아내에게 비서랑 같이 3P를 하면 어떠냐고 제안했다든가[* 퇴짜를 맞자 비서를 하나 더 불러서 했다는 설도 있다.], 두번째 아내인 나데즈다가 사실은 스탈린의 친딸이라든가[* 나데즈다의 친모가 사실 스탈린의 연인이었고, 후에 이 사실을 안 나데즈다는 우울증에 걸려 자살했다는 설.], 사실 나데즈다는 자살이 아닌 스탈린을 비판하다 분노한 스탈린에게 살해당했다든가 사실 스탈린은 페도필리아라든가 등 여러 소문이 있으나 신빙성은 낮다.[* 생전은 물론 격하된 사후에도 이런 논란에 관한 기록 자체가 없고, 나데즈나 친딸 설은 스탈린과 나데즈다의 친부모가 처음 만났을 때 이미 나데즈다는 3살이었다는 것으로 쉽게 반박된다. 또한 살해 설은 나데즈다가 걸어다니는 종합병원에 스탈린과 성격차도 심해 스트레스가 쌓이다 우발적으로 그랬다는게 정설이다. 페도필리아 설은 실제 스탈린의 외동딸 스베틀라나가 죽기 얼마 전부터 소년 소녀의 사진을 모았다는 증언과 그 이전에도 10대 여성들과 성관계를 여러번 가지기도 했고 두번째 아내는 그녀가 16세부터 사귀기 시작해서 2년 결혼한 걸 보면 일부 신빙성이 있다.] * 정치인으로 활동하기 전에는 시인으로 유명했고, '''소련이 건국되기 전''' 교과서에 시가 실린 적도 있었다. 집권 후에도 여러 시나 저술을 남겼다. 스탈린의 시적인 능력은 냉철하다 못해 기계 같은 이미지와는 대비되게 매우 뛰어났다고 하며 시인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는 수준이라는 평도 있을 정도. 다만 최고지도자가 된 이후로는 주로 러시아어를 쓰다보니까 모어인 조지아어에 서툴러져서 어머니와 의사소통을 주고나눌때에도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 첫번째 아내 예카테리나의 장례식 때 몰래 잠입한 정보부 요원을 눈치채고 도주한 적이 있다. * [[제임스 메이]]가 [[더 그랜드 투어]] 촬영 때 실수로 스탈린 생가의 캐비닛을 부순 적이 있다.[* 그러자 제임스는 자신이 [[굴라그]]에 갈 거라고 농담 했다.] * 별장에 영화관이 있을 정도로 영화를 좋아했는데, 서부극을 특히나 좋아했다고 한다. 간부들을 모아놓고 자기가 영화를 고르게 하고 나서 영화를 봤다고 한다. * 스탈린은 소련의 최고 권력자 치고는 소박한 식사를 했는데 아침 식사는 우유를 섞은 쇠고기 국물에 오트밀을 넣은 죽을, 점심과 저녁에는 스프와 생선을 좋아했다고 한다. 과일 중에서는 [[바나나]]가 취향이었다. * 다만 전임인 레닌이나 후임인 흐루쇼프에 비하면 꽤 미식가였던 편이라고 한다.[* 레닌은 음식에 대해서 크게 따지는것이 없아서 주는대로 먹는 편이었고, 흐루쇼프는 토속적인 음식을 주로 즐겨먹었다한다.] 애초에 스탈린의 고향이 소련에서도 음식이 맛있기로 소문난 조지아였고, 스탈린이 젊었을때 주로 조지아에서 활동했다는것을 생각하면 이상할것이 없기는 했다. * 2021년 취임한 [[인도]] [[타밀나두]] 주총리는 [[https://en.wikipedia.org/wiki/M._K._Stalin|M. K. 스탈린]]이다. 1953년 3월 1일생인데 며칠 뒤 사망한 스탈린의 이름을 따 지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처럼 콧수염도 있다.(...) 무신론자이지만 반종교주의자는 아니라고 밝히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당적은 ~~공산당이 아니고~~ 드라비다 진보당. * 푸틴이나 메드베데프같은 최근의 러시아 지도자들은 공식적인 입장으로는 스탈린에 대해서 부정적이다. 그 이유는 간단한데 푸틴이나 메드베데프나 소련을 무너뜨리고 러시아를 수립한 [[옐친]]의 계보를 잇는 데다가, 공산당은 야당이며, 그 공산당이 스탈린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스탈린의 실책과 폭정을 부각하면 부각할수록 자신들이 유리한 상황이다. 푸틴은 스탈린이 히틀러보다는 그래도 낫다는 정도의 평가를 했지만 확실하게 폭군이며 독재자라는 평가를 했으며 시종일관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다만 2000년대 후반 이후 헌법개정을 하면서 철권통치의 야욕을 드러내면서 스탈린 통치시절에 일어났던 압제에 대해서 당시 서방의 음모와 스파이 때문에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거나 다른 나라도 어두운 과거가 있었다는 식으로 두둔했다. 메드메데프는 대통령 재임기간 내내 어떠한 경우에도 정당화 시도는 옳지 않다며 젊은이들을 매섭게 비난했고 스탈린을 넘어 소련 자체를 전체주의 정권임이 확실했다며 스탈린을 넘어 소련도 부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 저러는 푸틴도 현상황을 보면 점점 스탈린을 닮아가고 있다.-- * 러시아에서 활동하고 있는 고려인 작가 아나똘리 김의 에세이인 <초원, 내 푸른 영혼>에 의하면 소련 연해주에 살고 있던 고려인들이 스탈린의 지시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했다가, 2차 대전이 끝나자 다시 연해주로 돌아갈 수 있게 허락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아나똘리 김의 아버지가 연해주 현지에 살던 소련인 교사들한테 고려인 아이들을 위해 학교 수업을 해달라는 부탁을 했는데 거절당하자, 스탈린한테 직접 고려인 아이들이 학교 수업을 받게 해달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냈는데 이틀 후에 스탈린 본인으로부터 직접 답장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고려인 아이들의) 학교 수업은 반드시 다시 시작될 것임. 이오시프 스탈린."이라고 아주 짧게 적혀 있었는데 놀랍게도 다음 날 아침 소련인 교사들이 아나똘리 김의 아버지를 직접 찾아와서 굽실거리며 고려인 아이들이 학교 수업을 받도록 적극적으로 도와줬다고 한다.[* 출처: 초원, 내 푸른 영혼/ 아나똘리 김 지음/ 김현택 번역/ 뿌쉬낀하우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